당과 사회단체를 일체화하더니 정점에 선 대통령 부부
당과 사회단체를 일체화하더니 정점에 선 대통령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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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기자]
▲ 1956년 실시된 제3대 대통령선거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 선거홍보물이 동대문에 붙어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의 정치에서는 파시스트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의 DNA가 나타난다. 이승만의 여당인 자유당의 조직 구조가 그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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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은 1951년 12월 23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정당으로 창당됐다가 1952년 하반기에 사실상 통합됐다. 그 기간 동안,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된 자유당은 편의상 원내 자유당으로, 그렇지 않은 자유당은 원외 자유당으로 불렸다.
더 강한 쪽은 원외 자유당이었다. 1952년 9월 21일 자 <경향신문> '정당세계통신비
스켓취: 원외자유당 (8)'은 "원내는 국회의원의 집단이라 현실의 이(利)는 많었으나, 지방 조직에 있어서는 국민회와 한청(韓靑)의 기반을 가진 원외에 당해낼 리 만무"라며 "단시일 내에 원외측 일색으로 지방조직이 완료됐다. 순식간에 3백만의 당원을 응하는 천하 유일당이 되었다"고 말한다.
대한국민회와 대한청년단(한청) 등이 가세한 원외kcb 올크레딧
자유당의 당원 숫자가 그해 7월 19일 전당대회에서 보고됐다. 이 대회에 관한 그달 21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전국 당원 수는 2백 98만 6백 십명"이라고 보도했다.
전쟁 중의 조사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해 3월 말의 총인구는 6월 3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1885만 5678명이다. 위 당원 숫자에 허수가 있을 수 있고 인구시골집매매 시골집매매82닷컴
조사에 누락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점들을 감안해도 원외 자유당의 당세는 대단했다.
이 당세는 국회 밖의 자유당이 국회 안의 자유당을 끌어내 통합으로 나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의 제2기 임기 취임식(8.15) 뒤인 그해 9월 21일 원외 자유당이 원내 자유당과의 합당 성사를 발표하고, 11월 17일 원외 자유당이 자유당 명의자동차 할부 이율
로 국회교섭단체 등록을 마쳤다. 이로써 두 자유당은 사실상 하나가 됐다. 원내 자유당 잔존세력은 그 뒤 현저히 약화됐다.
1951년 연말에 탄생한 원외 자유당이 단기간에 많은 당원을 확보한 것은 독립운동가 이범석이 미군정의 지원하에 결성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 출신들이 지방 조직을 탄탄히 구축했기 때문인 동시에, 주요 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청약통장 일원화
회원을 인적 자원으로 제공했기 때문이다.
국가와 한 몸이 된 사회단체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73년에 발간한 <대한민국 정당사 제1집 1945-1972년>은 "원외에서는 국민회 측의 이활이 중심이 되고 노총의 주종필과 농총의 채규항이 주동이 되어 참여"했다고 한 뒤 "5개 기간(基幹) 사회단체로서 국민회·대한청년단·대공유형
한노동조합총연맹·농민조합연맹·대한부인회 등의 각 대표가 결합하고 기타 사회단체가 포섭하여 신당발기준비협의회(신협)를 구성하여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했다고 알려준다.
원래대로라면 압력단체나 이익단체의 성격을 띠어야 할 5대 단체들은 단순히 자유당의 협력 단체가 아니었다. 이들은 이 당의 일부가 됐다. 자유당과 5대 단체의 이 같은 결합은 쌍한부모가정 임대아파트
방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한국정치학회보> 1985년 제19집에 실린 손봉숙 당시 이화여대 박사의 논문 '한국 자유당의 정당정치 연구'는 "우리는 정당의 개념을 정의할 때 흔히 압력단체와 구별한다"라며 "정당이 합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공직에 후보자를 내세우고 정권 획득을 추구하는 데 비해 압력단체는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든가, 한국거래소 채용
또는 정당이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염두에 둠으로써 이익의 표출 기능보다는 집약 기능을 수행한다는 데 중점을 둔다든가 하는 구별이 그것"이라고 한 뒤, 쌍방의 결합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주요 압력단체를 모두 산하 기간단체로 삼은 자유당은 정당과 압력단체를 합한 초(超)정치적인 특수 조제일은행이자율
직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 여파는 정당으로서 출범한 자유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압력단체로 출발한 사회단체의 경우에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겉으로는 압력단체의 이름을 내걸었으나 이들은 공직에 후보자를 추천하여 권력 추구에 급급하거나 정권의 도구화되어 갔다. 또한 자체 집단 구성원의 이익 대변이나 추구보다는 항상 자유당의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어용기관으로 전락해갔다."
위 단체들은 사실상의 국가기관이 됐다. 이들은 나랏일을 했고, 이들의 운영에 국가가 개입했다. 심지어, 이들이 거두는 회비는 비공식적인 세금이 됐다. 이는 대중의 삶에 상당한 부담이 됐다. 1949년 12월에 실시된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국정감사 결과를 보도한 1950년 2월 26일 자 <조선일보>는 "국민회·청년단·부인회 회비, 학교 후원회비 등 기외(其外) 허다한 기부 징수는 생활난에 신고(辛苦)하는 국민대중에 정치상 일대 문제"라고 지적했다.
위 단체들이 국가와 한 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많다. 하나는 이승만이 대한노총 총재를 겸하는 장면이다. 일례로, 1952년 5월 27일 자 <동아일보>는 "대한노총 총재 이승만 박사는 지난 24일부로 대한노총 전국대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라며 이승만이 전국대회 날짜를 그달 31일로 정한 일을 알려준다.
또 다른 장면은 대통령 부인이 대한부인회 총재를 겸하는 모습이다. 1949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여성단체들이 모두 해산되고 대한부인회가 이틀 전에 새롭게 출범했다면서 대한부인회 제1회 전국총회의 임원 선임 결과를 "총재 리 푸랜세스카, 부총재 조신성·황애덕, 회장 박순천, 부회장 유각경·오인실"로 보도했다.
자유당과 사회단체를 일체화하고 그 정점에 이승만 부부가 우뚝 섰다. 이 시스템은 이승만 정권이 각종 직능단체 위에 군림하고 각 단체를 통해 대중을 지배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국가가 노동조합 등의 이익집단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조합국가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 부부
ⓒ 국가기록원
이승만이 표방한 일민주의
히로히토 및 히틀러와 더불어 전체주의 3축을 형성한 무솔리니는 1928년에 제정한 직능대표법을 통해 각종 직능단체들을 자기 수하에 두고 이 단체의 대표자들로써 파시스트대평의회를 구성한 뒤 이를 통해 대중을 지배했다. 비슷한 시스템이 자유당정권하에서도 구현됐다.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독재가 여기서도 모방된 셈이다. 이승만은 무솔리니의 방식을 발판으로 영구집권을 희망하는 황제 지망생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조합국가적 특성은 다른 분야의 대중들에도 악영향을 끼쳤지만, 조만간 한국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될 노동자들의 지위에도 특히 많은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노동조합의 자유당 편입은 노동자들이 노조 단체를 통해 국가에 예속되는 모순을 만들어냈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조봉암과 1950년대> 상권은 미군정기인 1946년에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후신인 대한노동총연맹에 관한 대목에서 "대한노총은 탄생 과정부터 노동운동단체라기보다 정치세력의 하수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이승만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러한 성격이 더욱 두드러져 권력으로부터 이용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 뒤 이런 설명을 한다.
"대한노총은 어떠한 단체보다도 앞장서서 이승만한테 충성을 바쳤으며,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유당 조직의 일부로 복무하였고, 말기로 갈수록 더욱 심하였지만 노동조합은 자동적으로 자유당 말단 당원으로서 부정선거의 도구로 취급받았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기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는 노동 조직과 파쇼권력의 관계는 한국형 파시즘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위 설명은 1951년 연말에 창당된 자유당(원외)이 이듬해 중반에 300만 당원을 확보한 비결을 알려준다. 이승만 정권의 조합국가적 특성, 파시스트적 성격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파시스트 이승만의 지배로 인해 노동자들은 자유당 정권에까지 예속되는 이중의 고난을 겪게 됐다.
지금 극우세력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기독교 입국(立國)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하늘에 바치려 하지 않고, 새롭게 개조해 그 자신의 수중에 두고자 했다.
이승만은 일민(一民)주의를 표방했다. 전 국민을 하나의 계층·계급으로 균일화시키는 일민주의는 만인(이승만 제외)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옛날 군주들의 일반적인 욕망이었다. 이승만은 그렇게 만인을 균일화시키는 한편, 조합국가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다. 이것은 그 자신이 황제가 되고 하나님이 되는 길이었다.